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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나시 화장터

죽으면 한 줌의 재가 된다는 말을 두 눈으로 보았다. 다 타고 숯과 재만 남은 그곳. 아무 것도 안 보이고 재만 있었다. 재만 남았다.
블루라시집에서 라시를 먹는데 눈 앞으로 시신을 운반하는 행렬이 3분에 한 번 꼴로 지나 다닌다. 나는 그걸 보고 속이 좋지 않았다. 먹던 라씨를 못 먹겠을 정도로 속이 좋지 않았다. 원래 힘 없고 아팠던 몸은이 더 힘 없고 아파오는 게 느껴졌다. 몸에 힘이 풀렸다. 아마 죽음에 대한 내 두려움 때문에 여기 바라나시에 오고 몸이 아파진 것 같다는 직감이 왔다. 죽음에 대한 저항.
화장터로 갔다. 입구에는 나무 장작이 높고 길게 쌓여 있었다. 벌써 마음이 무겁다. 어둡다. 화장터 맨 위 건물로 현지인이 나를 데려갔다. (나중에 알고 나니 이렇게 구경(?)시켜주고 스토리텔링을 한다음 돈을 요구하는 사람) 화장터 안에서 시신을 볼까봐 겁나는 마음으로 따라 갔다. 그 위에서 본 화장터 전체의 모습은 내게 공포를 불러 일으켰다. 검은색, 회색, 붉은색. 재와 숯, 불. 그리고 시신을 감쌌던 형형색색의 천들이 여기저기 널부러져있다. 그저 나무 장작만 타고 있는 것 같이 보인다. 방금 막 불을 붙인 곳에는 흰 천에 둘러 쌓인 시신이 있다. 왜 이 풍경은 내게 공포와 참혹한 감정을 불러 일으킬까.
나는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걸 좋아(?)했다. 죽음은 두려운 게 아닌데 왜 난 죽음을 두려워 할까. 죽음 보다는 죽은 몸을 두려워 한다. 어쩌면 몸에 대한 집착이 많은지도 모른다. 장례식장에 가는 것도 두려워 했던 나다. 죽음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고정관념을 깨고자 과거에 내가 바라는 장례식을 그려보기도 했었다. 죽은 몸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깨고자.
화장터는 높은 건물이 하나 있고 아래 야외로는 층층이 화구가 있다. 그 높이 차이는 계급을 의미한다고 한다. 참인지 거짓인지는 모르겠다. 위에 건물에는 한 구의 시신과 재만 보이는 거의 다 탄 자리 몇 군데만 있었다. 야외 회장터에는 재와 숯만 남아 거의 다 탄 곳, 막 시신을 눞여 놓고 불을 붙인 곳, 시신을 싼 천이 모두 타서 발과 머리가 드러나 검게 그을려 숯이 되고 있는 몸. 유가족들. 계속 불을 지피는 사람들. 나무를 옮기는 사람들. 옆 계단에서 그걸 구경하고 있는 나같은 사람들. 회색 연기와 매쾌한 냄새. 감기에 걸려서 냄새를 잘 맡을 수 없었지만 뭔가 익숙하지 않은 냄새가 나는 건 확실했다. 그리고 그 아래 강과 만나는 곳, 강물에는 사람들이 들어가서 강둑아래 재를 소쿠리로 퍼서 뭔가를 찾고 있었다. 부자일수록 간혹 시신에 금 장신구를 걸고 태운다. 그래서 그 보석을 찾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그 안에서 뭔가에 압도되어 나는 쉽게 발걸음을 땔 수 없었다. 왜 죽음은 ‘끔찍’하게 이루어질까. 왜 우리는 죽음을 맞이하며 ‘끔찍’해질까. 왜 죽은 몸에 두려움과 끔칙함이라는 감정이 묻은 걸까. 육신을 벗어난 영은 무한히 평온해질텐데 말이다.
오늘 아침에는 여느때와 같이 몸을 풀고 있는데 승은 언니가 수민과 와서 어제 밤에 지진이 났고, 네팔은 크게 나서 사람도 많이 죽었다고 말해줬다. 나는 생각했다. 간밤에 나는 자다가 건물에 묻혀 죽었을 수도 있겠구나. 다시 한번 얇은 유리병같은 삶을 느낀다.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이 사는 게 다시 한번 중요하게 느껴진다. 어디에서 무얼하든 죽어도 괜찮게. 나는 그렇게 살고 있는가? 지진이 나 자신에게 질문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대답은 예스다. 덕분에 나의 아침이 더 즐겁고 더 밝았다.
어찌보면 삶은 정말 찰나의 순간인지도. 육신을 얻은 시간이 찰나의 순간일지도.
2023. 11. 4